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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어의 사회성

책상은 책상이다라는 책이 있다. 중고등학교 때 언어의 많은 특징에 대해 배우는데, 그중에서 언어의 사회성이라는 것을 배운다. 언어란 사람들 간의 의사소통을 위한 도구이며, 그래서 추상적인 생각이든 구체적인 물건이든 어떤 의미에 대해서 어떻게 부르자는 사람들 간의 약속을 언어의 사회성이라고 한다. 저 책에서는 그 사회성을 무시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슬랙이라는 메시징 앱이 있는데 이 앱이 유행하면서 아직 채팅 공간이 없는 커뮤니티들은 IRC 대신 슬랙을 사용하고 있고, 그래서 이것저것 추가를 하다 보니 10개를 넘어갔다가 다시 추려서 7개만 남았는데, 그중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고 있고, 계속 1번에 위치했던 이상한 모임 팀에 질문이 올라왔다. (슬랙은 업무용 툴이라 하나의 단위가 팀이다. 사실 이 글이 중복 게시되는 메타블로그를 통해 보는 사람이 대다수라 부연설명이 필요 없을 수도 있지만, 혹시 모르는 분들이 있을까봐 남겨봤다. )

"Lazy evaluation를 뭐라고 번역해야 좋을까요?"

한국어 위키에 "느긋한 계산법"이라고 되어있다며 질문이 올라왔고 질문한 분은 "이따 평가"라는 제안을 했고 나는 "지연평가가 가장 흔한 번역같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필요해질 때까지 평가를 미뤄둔다는 의미에서 Lazy의 번역으로 '지연'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는데, 지연이라는 말에 타의적 혹은 일정 시간이라는 정적인 뉘앙스가 있다고 생각해서 원래 의미가 살지 못해서 좋은 번역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 번역을 들었을만한 사람(특히 개발자)들은 대부분 "Lazy Evaluation"이라는 원문과 동시에 그 원문의 뜻을 같이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좋은 번역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뉘앙스를 알 수 있다는 의미로 나는 "합의된 번역"이라고 표현한다.


도입에서 말한 언어의 사회성이라는 것은 번역어에도 적용된다. 하지만 언어끼리의 1:1 매칭이 되는 표현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특수성 때문에 번역어에서의 사회성은 언어의 사회성과 다소 차이가 있다. 자연스럽게 시간이 흐르면서 생기는 사회적 합의 없이, 이미 존재하는 언어의 이미 존재하는 표현을 갑자기 다른 언어의 다른 표현으로 옮기는 것에는 사회성이 존재하기 어렵다. 그래서 많은 번역어가 사회적 합의 없이 생겨나고 생긴 뒤에서야 사람들이 그 표현에 익숙해지는 후불제 합의에 가깝다. 그래서 어떤 분야를 맨 처음 번역하는 사람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처음 시도했던 번역어가 후세에도 많은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고, 그 영향을 벗어나 새로운 합의를 만들어내기까지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사람은 언어 자체를 공부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또 다른 번역자일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의 주도 하에 결정되기보다 사회적 합의를 이루기 위해 커뮤니티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페이스북의 개발자영어라는 그룹에서 종종 그런 글들이 올라온다. 이런 말은 보통 이렇게 번역하는데 더 좋은 표현이 없을까 하는 질문글. 저 그룹이 어떤 권위나 영향력이 있지는 않지만, 합의를 위해 토론이 이루어지는 (내가 아는 한에서)유일한 커뮤니티이다.

이 생각을 맨 처음 했던 것은 얼마 전에 읽었던 책 때문이다. 유명한 역자분이 번역했고, 역자 서문에서부터 현재의 (합의된)번역어보다 더 어울리는 말을 찾기 위해 많이 고민하고 노력했다고 적혀있고 책을 읽으면서 생소한 단어 때문에 읽는 데 방해도 많이 되긴 했지만, 무슨 뜻일까 거꾸로 영어로 영작해보기도 하고 원문을 찾아보고 한자어의 경우 한자 뜻을 찾아보고 나서야 어떤 의도로 그런 번역어를 만들었다고 이해하기도 했고 혹은 아무 문제 없다고 생각했던 번역어를 굳이 쓰지 않고 곡해하기 좋은 새로운 번역어라고 생각되는 경우도 있었다.

책을 읽으며 아쉬웠던 점은 합의없이 새로운 표현을 만들어냈다는 것이 아니라, 생소한 표현을 처음 사용할 때는 차라리 원어 병기를 통해 유추라도 가능하도록 도와줬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너무 많았다는 점 정도다. 번역어에 대한 합의는 현재 그럴만한 적당한 공간이 없기 때문에 그걸 생략했다고 누구에게 뭐라고 할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더욱 그럴만한 적당한 공간이 없다는데 더 안타깝다.


마무리로 광고를 남기자면 이상한 모임의 슬랙에 들어와 보시면 이 공간의 아이덴티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위에서 말한 번역에 대한 이야기도 간혹 하고, 개발자가 많다보니 개발에 관한 채널이 많지만 그 이외에도 각종 가젯(gadget)/SW 지름, 음악, 책, 디자인, 운동 등 아주 잡다한 분야에 대한 이야기가 항상 오고가서 어떤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한다고 특별히 정의내려서 설명하기 어렵다. 그냥 직접 와서 겪어보는게 이해하는데 제일 좋다. 굳이 공통점을 꼽자면 재미있는 것에 목마른 사람들이라고 표현하고 싶다.